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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달러의 공포

우리는 그랜드센트럴 역에서 구간전철을 내렸다. 훈훈한 조명이 켜 있는 오이스터바(Oyster Bar, 뉴욕에서 굴 등 해산물을 전문으로 시작된 식당) 앞을 지나다가 문득 애니에게 같이 식사라도 하자고 제안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순간 세금 신고기간에 회계사 사무실에 앉아 있던 몇 주 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내 회계사인 로렌스 베스트는 광고업계에서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의 돈을 전문적으로 관리해 주고 있었다. 작년에 나는 로렌스에게 더 이상 수고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음을 통고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나를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세금 내역서를 가져가면서 나는 그의 아이들을 위해 스타벅스이용권을 두 장 챙겨갔다. 로렌스는 그 작은 사례를 기쁘게 받아 주었다.

“아이들이 아주 좋아하겠네요.” 그가 말했다.
“스타벅스를 애용하거든요. 지금 모두 대학생이라 아주 잘쓸 겁니다."
그리고는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런데······사용하신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카드 내역을 보니 오이스터바에서 식사를 하신 걸로 되어 있더군요."
"예. 스타벅스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마침 있어서요."
"하지만," 로렌스가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이더니 말했다.
"선생님은 이제 접대비가 따로 지급되는 광고계 중역이 아닙니다. 지금 일하시는 스타벅스에서 얼마를 버시죠? 한 시간에 10달러는 되나요? 그 액수로는 굴 하나 값도 감당이 안 되잖아요?"
로렌스는 의자에 몸을 기대면서 서류로 뒤덮인 책상 위에 놓인 조그만 종이 봉지를 가리켰다.
"제 점심입니다."
그가 하는 말의 요지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오이스터바에서 늦은 저녁이라도 먹고 가자고 애니에게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 그래도 애니에게 사과는 하고 싶었다. 크리스털이 그리도 강조하는 존중과 품위······. 나는 내가 애니는 물론 아이들 중 그 누구에게도 존중과 품위로 대해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거만한 바보였다. 내 삶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면서 아이들에게 충고랍시고 떠들어댔으니······. 애니와 나란히 걷던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 아이의 맑고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빠의 바보 같은 실수를 용서해 주려무나."
애니가 팔을 뻗어 나를 껴안았다.
"맞아요, 아빠는 바보 같았어요. 하지만 아빠가 스타벅스에서 일하는 건 아주 마음에 들어요."

이 책의 원제는 'How Starbucks Saved My life'이다. 스타벅스와 크리스털은 한때 모든 걸 다 가졌던 쇠락한 노신사 마이클 게이츠 길의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목숨을 구해 줄 손의 가치는 그걸 알아보는 혜안을 가진 사람에게만 성립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번역하는 내내했다. 한때 저자가 가졌던 부와 명예와 영화는 스타벅스와 크리스털이 내밀어 온 '구원의 손'의 가치를 알아볼 눈을 가리고도 남을만한 것이었다. 절박했기에 아무 손이나 덥석 잡기부터 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중도에 한 번쯤은 '중단'의 유혹이 있음직했기에. 옮긴이 

크리스털

수잔과 나의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 철저히 오해하고 있었다. 수잔은 내가 요가에 관심 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요가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오죽하면 나는 스트레칭도 좋아하지 않았다. 스트레칭을 하면 근육이 더 뻣뻣해지는 기분만 들었다. 안 그래도 나는 아주 많은 부분에서 뻣뻣한 사람이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나는 예전 노래가 좋고 예전 방식이 좋았다.

그러나 수잔은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게 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요가 강좌가 열리는 장소에서 나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내가 삶의 이런저런 골칫거리들을 더 많이 이해하고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아주 유연하고 속 넓은 사람이리라 생각했다. 말하자면 지혜로운 도인 같은······.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까지 잘못 볼 수 있다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었다. 수잔은 나를 잘못 봤고, 나는 수잔을 잘못 봤다. 나는 수잔이 위로와 보호를 필요로 하는 막막한 처지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꽤 명망 있는 정신과 의사였다. 나는 그녀가 나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다. 수잔은 내가 자신을 도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둘 다 그렇게 서로를 잘못 봤다. 그래도 우리 둘사이에는 처음 보는 순간부터 서로를 강하게 잡아당기는 자력이 작용했다. 혹시 그 강한 화학 작용은 극과 극이 서로 잡아당긴다는 속설의 증거였을까? 하필 처음 만난 장소가 이른 아침 헬스클럽이었다는 것도 이유가 되었다. 나는 달리할 일이 없었고, 수잔은 다음 환자를 보기까지 두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분명 강한 자력을 느꼈음에도 나는 말을 마치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 정도로 뻣뻣한 사람이었다. 싸구려 헬스클럽에 오가다 만난 아무나하고 뭘 어쩌려고······.

“저하고 커피 한 잔 하시겠어요?”

내가 막 문을 나서려는데 수잔이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 어찌나 그 소리가 작았던지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 또한 이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좋죠. 한잔합시다.”

슬픔에 잠긴 저 자그마한 사람과 커피 한 잔 나눈다고 무슨 큰 일이 날까······, 스타벅스에서 라떼나 마시며 그녀의 기분을 돋워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수잔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스타벅스가 아니라 자신의 아파트였다. 나는 그녀를 따라갔고 우리는 그렇게 이어졌다. 그 뒤로 일주일에 두세번, 수잔에게 자유시간이 날 때마다 나는 그녀를 만났다. 알고 보니 수잔은 그렇게 젊은 나이는 아니었다. 40대 중반이었다. 수잔은 일찍이 산부인과 의사에게서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더더구나 결혼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결혼은 아이를 갖기 위한 수단이죠. 섹스는 결혼이란 강요가 없을 때 더짜릿한 거구요.”

그러면서 수잔은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은 이미 결혼한 몸이니 잘 알겠죠.”

수잔은 내 결혼반지를 쳐다보며 그 사실을 내게 상기시켰다. 그녀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이 갔다. 그와 더불어 주체할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나는 수잔과 함께 하는 시간이 무척 좋았다. 하지만 나는 양손에든 케이크를 둘 다 먹고 싶었다. 내 아내를 여전히 사랑했고 내 아이들이 안정된 가정환경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수잔이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한 번도 그런적이 없었는데······.

“당신을 만나야겠어요.”
“언제?”
때는 오전7시 30분. 아침식사를 하기도 전이었다.
“지금 당장······”

수잔의 집으로 갔더니 그녀가 알몸으로 서 있었다. 커튼이 활짝 젖혀진 창밖으로 이스트리버(East River)가 내려다 보였다. 3월이었지만 강물은 따사로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마이클.” 수잔이 속삭이듯 말했다.
“저, 임신했어요. 하느님이 이 아기를 꼭 낳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네요.”

심장이 멋는 것 같았다. 이건 내가 원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직장을 잃어 내 가족을 부양하기도 버거운 형편이었다. 이 상황에 또 다른 아이라니······.

"무슨 생각 해요?”
“당신이 결정할 문제야.”
“당신 생각은 어떤데요?”
“아무 생각 없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다고 유산시키라는 말을 할수도 없었다. 수잔에게는 엄마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이건 기적이에요, 마이클. 하지만 당신 도움이 필요해요.”
“나는 빈털터리야.”

그러자 수잔이 웃었다. 수잔은 나에 대해 또 다른 오해를 갖고 있었다. 내차림이 그럴듯해 보여 나를 대단한 재력가로 생각했던 것이다. 세상을 호령하듯 당당한 겉모습 뒤에서 내가 매일 가난해져간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지못했다. 나는 수잔과의 관계를 죽 비밀에 붙였다. 그러나 조나단이 태어난 뒤 아내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는 우리 관계를 묵인해 주지 않았다.

“외도는 그렇다 쳐도,” 아내 베치가 말했다.
“자식을 본 건 또 다른 문제에요.”
베치는 명민했다.
“나는 감당 못해요. 난 이런 일을 참아낼 주제가 못돼요.”
베치는 내가 저지른 멍청한 짓에 격분했다. 그래도 우리는 '우호적으로' 이혼했다.
“난 우리가 평생 함께 할 줄 알았어요.”
아내의 그 말에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아이들은 이제 다 커서 성인답게 이해해 주긴 했지만, 상처받고 슬퍼하는 기색은 역력했다. 나는 베치에게 우리 집을 주었고 아내에게는 가정을 꾸려갈 자금이 충분했다. 하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베치의 인생을 망쳤다······. 그리고 나 자신의 삶도 망쳤다. 

스타벅스 잡학 퀴즈

"스타벅스의 이름은 어디서 유래되었나요?"

순간 불안한 침묵이 흘렀다. 크리스털은 이 문제의 답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이베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내가 대답해야 했다. 다행히 이곳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나는 스타벅스의 역사에 대해 틈나는 대로 읽었다. 원래 역사에 취미가 있었지만 스타벅스의 역사는 특히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스타벅스, 아니 '스타벅'은 어느 고깃배의 일등항해사 이름이었어요.”

“고깃배라구요?” 그 남자가 물었다. 보아하니 우리에게 승리의 기회를 호락호락 내줄 것 같지 않았다.

“에이헙 선장의 배였죠·····, 모비딕을 찾아 나선. 스타벅은 커피를 아주 좋아했어요.”

더불어 그 일등항해사의 이름을 채택하긴 했어도 스타벅스를 설립한 젊은이들은 사실 그 이야기를 제대로 알지는 못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났다. 우리 세대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들 역시 '백경'을 의무적으로 읽어야 했지만 대충 훑어보고 말았다고 했다. 하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처럼 '백경' 역시 학교에서 정해준 필독도서였을 뿐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는 사람은 별로 없는 그런 책이니까.

"'스타벅스'라는 이름에 대해 또 아시는 게 있나요?”그 젊은 남자가 물었다.

“그 이름이 훌륭하다는 거요.”

그 질문에 맞는 답을 했다는 확신이 들자 내 마음이 뿌듯했다. 크리스털이 기뻐하는 게 보였다. 이베트는 내 팔을 힘주어 잡았다.

“스타벅스는 아주 멋진 이름입니다.” 내가 말을 이었다. “첫째, 독특하고, 둘째, 발음하기 쉽고, 셋째, 혜택이 연상되니까요."

이세 가지는 광고 회사에서 제작 담당 이사로 있던 지난 날, 새로운 이름을 구상할 때 고객들에게 들이밀면 어김없이 먹혀들던 검증된 법칙이다. 훌륭한 이름에 필요한 3대 요건. 나는 그 세 가지 핵심 속성을 그렇게 불렀다.

곰 인형 부스에 있던 젊은 남자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도대체 이 별난 남자는 어디서 온 거야?' 아무래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 옆에서 크리스털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긴 기회만 주어지면 언제든 내 입에서 광고용 언어가 터져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테니까. 이베트는 지루한지 다음 행선지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 말인즉," 내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스타(star)가 되고 싶어하고, 또 모든 사람들이 돈(bucks)을 벌고 싶어하지요. 그 '스타'와 '벅스'가 만났으니 완벽한 이름이라 할 밖에요."

사태파악


"우리가 모두 똑같다고 상상해보라. 우리가 정치, 종교, 도덕에 대해 모
두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음악, 예술, 음식, 커피에 대
한 우리의 취향이 모두 똑같다고 상상해보라. 우리 외모가 모두 똑같다고
상상해보라. 식상하지 않은가? '차이'는 우리를 갈라놓는 개념이 아니다.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자. 자긍심은 모두 인간이 누려야 할 권리다."
(스타벅스 디카페인 그란데 카푸치노 컵 옆면에 적힌 글귀)

크리스털이 나를 대하는 태도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멍청이' 대하듯 했다. 차별대우를 받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순간 문득 밀려드는 후회······ JWT에서 일하던 시절에 크리스털이 나를 대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가 차별 대우했던 젊은 흑인 여성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제니퍼 월시는 1970년대 실시되었던 '소수인종 고용정책 Minority-hiring Initiative'에 힘입어 회사에 들어왔다. 그건 '다양성'을 존중하려는 회사 노력의 일환이었다. 얼마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순전히 소수인종 고용정책 덕에 입사할 수 있었던 만큼 제니퍼는 '부족한' 사람이었다. 내 눈에는 말이다. 나는 그녀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어야 했다.

그랜드센트럴 역에서 크리스털과 전화통화를 하던 그 순간까지 나는 배경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 대우를 당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JWT에 있던 시절에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너무나도 안이하게 선입견을 갖고 대했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때 우리는 동료들 대부분이 아이비리그 출신이라는 점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광고 비즈니스에서 우리는 단연 엘리트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수인종 고용정책 덕에 명문 대학을 나오지 못한 사람이 회사에 들어오면 우리의 위상이 실추된다고 여겼다.

제니퍼는 심성이 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2년제대학을 졸업한 그녀를 나는 JWT의 일원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주지 않았다. 처음 몇 주 동안 나는 광고 카피를 쓸 생각은 말고 우리가 만든 기존의 광고를 찬찬히 공부하라고 지시했다. 그런 후에 포드의 신문 광고 카피를 맡겼다. 제니퍼에게는 생애 첫 광고였다.

제니퍼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겁에 질리다 못해 얼어붙은 표정으로 그녀가 내 커다란 책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역시 JWT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구나 싶었다. 우리는 고객들에게 당당하게 비춰져야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새로운 환경에 도무지 적응을 못한 채 헤매는 것 같다며 핀잔을 주었다.

그러고 나서 광고 초안을 검토한 나는 제니퍼에게 공부해보라고 준 기존의 포드 광고에서 그녀가 아예 한 단락을 그대로 베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JWT의 일원인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표절'이었다. 우리 직업을 하필 '카피'라이터라 하는 것도 부분적인 이유였지만, 우리는 실제로 다른 사람의 작품을 '카피'하는 짓만큼은 용인하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제니퍼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돌이켜 보니 제니퍼는 그게 회사 규정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입으로 콕 집어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어쨌든 그때 나는 그녀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 두 번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제니퍼의 실수는 내가 암암리에 찾던 구실을 제공해 주었다. 나는 그 길로 경영진에게 달려가서 제니퍼는 장차 훌륭한 비서로서 재능을 발휘할지는 모르나, '광고'라는 고도의 기술을 습득할 재목은 못 된다고 말했다. 내게는 제니퍼를 위해, 혹은 '다양성'이라는 아이디어에 대해 재고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내게는 목숨처럼 소중한 일자리 기회를 아무렇지도 않게 취급하는 크리스털을 대하면서 내가 제니퍼를 '돕는다'는 허울 아래 얼마나 잔인하게 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나는 전형적인 위선자였다.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우리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제니퍼의 시도를 방해했던 것이다. 그녀가 내세울 만한 학벌도 없고 이렇다 할 경력도 없는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일이 있은 뒤 제니퍼는 인사과 서무로 자리를 옮겼다. 그 후 지금 이순간까지 그녀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살았다. 기분이 너무나도 착잡했다. 지금쯤 크리스털도 늙고 멍청한 백인 남자에게 실수로 일자리를 제의했다고 후회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그녀가 속한 세상에 어울리지도 않고, 그녀가 원하는 조건에 맞지도 않는 사람일 테니까······ 내가 몇 십년 전에 어느 젊은 흑인 여성을 상대로 느꼈던 것과 똑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