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사람이 발로 밟아 다지기만 해도 생긴다. 따라서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길은 반드시 존재한다. 로마의 길도 초기에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길이었을 것이다. 아피아 가도가 모습을 나타내기 전에도 로마에는 오래된 길이 몇 개나 있었다.
'살라리아 가도(Via Salaria)'는 '소금길'이라는 뜻이다. 테베레강 어귀에서 생산된 소금을 자루에 넣어 작은 배에 싣고 테베레강을 거슬러 올라와 로마에 하역한다. 로마에서는 소금 자루를 당나귀 등에 싣고 '소금길'을 지나 내륙으로 들어가서 이탈리아반도의 산간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팔았다. 초기의 로마인들에게 소금은, 판매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거의 유일한 생산품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르게 된 '소금길'이라는 이름이 이 길의 정식 명칭으로 정착된 것 자체가 당시 로마인에게 '소금길'이 갖고 있었던 중요성을 보여준다.
'라티나 가도(Via Latina), 티부르티나 가도(Via Tiburtina), 노멘타나 가도(Via Nomentana)' 이 길들은 각각 라티나로 가는 길, 티부르(오늘날의 티볼리)로 가는 길, 노멘툼(오늘날의 멘타나)으로 가는 길이라는 뜻이다. 초기의 로마인과 교류한 사람들이 사는 도시와 로마를 연결하고 있던 길인데, 이 길들도 '소금길'과 마찬가지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길이었을 게 분명하다. 건국 이후 400년 동안, 로마인의 길은 겨우 이 정도였다.
가도에 대한 사고방식이 완전히 바뀐 것은 기원전 312년에 '아피아 가도 (Via Appia)'가 착공된 뒤였다. 길은 이제 무언가를 나르는 길도 아니고 어딘가도 가는 길도 아니다. 가도의 명칭부터 사람 이름으로 되어 있다. 아피아 가도는 '아피우스의 길'이라는 뜻이다. 그해의 재무관이었던 아피우스가 입안하고 원로원이 가결하고 아피우스 자신이 총감독을 맡아서 건설했기 때문에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로마에서는 법률도 '셈프로니우스 도로법'이나 '율리우스 농지법'처럼 제안자의 이름을 붙여서 부른다. 법률 제정은 곧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고, 가도 건설도 역시 국가의 정치라고 보는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아피아 가도의 입안자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원로원 회의장에서, 완전히 새로운 개념으로 착공될 도로 공사가 어디까지 이루어질 것인가를 설명했을 게 분명하다. 일단은 카푸아까지만 길을 놓겠다고, 카푸아는 당시 로마가 제패한 지역의 남쪽 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리하여 어떤 지역을 로마군이 정복한 뒤에는 그 로마군이 거기에 길을 놓는, 로마인의 통치 방식이 첫걸음을 내디뎠다. 아피아 가도도 기원전 268년에 베네벤토가 로마 영토에 편입되자마자 거기까지 연장되었고, 다음에는 베노사까지, 거기서 다시 타란토까지 연장되었다. 종점인 브린디시까지 뚫린 것은 아드리아해에 면해 있는 이 항구 도시가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온 20년 뒤의 일이었다. 착공에서 완공까지 무려 70여 년의 세월이 걸린 것은,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온 곳까지만 길을 뚫는다는 방침에 따라 단계적으로 공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피아 가도가 완전히 개통된 해에 아피우스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 뒤, 지구 반대편에서는 만리장성 축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