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B.Malcolm Gladwell.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B.Malcolm Gladwell. Show all posts

(What The Dog Saw) Something borrowed: Should a charge of plagiarism ruin your life?

음악계에서 지적재산권을 저작권과 저작인접권으로 나뉜다. 어떤 작곡가가 'Piano Man'의 일부를 쓰고 싶다면 저작권을 소유한 Billy Joel과 저작인접권을 소유한 음반회사로부터 모두 허가를 얻어야 한다. 

저작권법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유사성 여부가 아니라 원본의 독창성과 인용한 정도다. 지적재산권의 원칙은 '남의 물건을 탐하지 말라'는 도덕률을 직선적으로 적용하지 않는다. 핵심은 인용의 맥락이다. 가령 지적재산권에는 기한이 있다. 신약 특허의 경우 20년간 지적재산권을 보호받을 수 있다. 그 후에는 누구나 특허 받은 기술을 활용할 수 있다. 이 제도는 의미 있는 발명을 한 사람에게 한시적인 독점을 통해 경제적 인센티브를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새로운 발명의 혜택을 누리는 일도 중요하기 때문에 20년이라는 기한을 둔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기존의 발명을 참고해 더 나은 대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호과 제한의 균형은 헌법에 명기돼 있다. 미국 헌법에는 '저작물과 발명품에 대해 한시적인 권리를 인정하여 예술과 과학의 진흥을 촉진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면 글도 다른 자산과 마찬가지로 쓴 사람에게 속하는 것일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Lawrence Lessig 스탠퍼드 법학 교수는 'Free Culture(무료 문화)'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저작권을 재산권으로 부르는 것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저작권에 속한 자산은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가령 내가 당신의 뒷마당에 놓은 피크닉테이블을 가져간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가져가면 당신은 피크닉테이블을 잃는다. 하지만 내가 뒷마당에 피크닉테이블을 놓는다는 아이디어만 빌리는 것은 어떨까? 이때 내가 가져가는 것은 무엇일까?

핵심은 피크닉테이블과 아이디어처럼 취하는 대상의 물성이 아니다. 물론 그 차이는 중요하지만 진정한 핵심은 특수한 사례를 제외한 일반적인 경우 세상에 나온 '생각'은 무료라는 것이다. 당신의 패션을 흉내 낸다고 해서 내가 당신에게 빼앗는 것은 없다. 매일 당신과 똑같은 옷을 입는다면 이상하게 보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토머스 재퍼슨은 "내게서 아이디어를 얻는 사람은 내 아이디어를 왜곡하지 않고 배움을 얻는 것이며, 내 초에서 불을 빌리는 사람은 내 초를 어둡게 만들지 않고 빛을 빌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의 패션을 흉내 내는 경우에도 적용된다. 

하지만 표절(plagiarism)은 성격이 다르다. 한 작가가 다른 작가의 글을 어느 정도까지 베낄 수 있는지 결정하는 도덕률은 더 엄격하다. 문학의 경우 남의 글을 베끼는 것 자체가 용납되지 않는다. 얼마 전 Laurence Tribe 하버드 법학 교수가 1985년에 쓴 'God Save This Honorable Court(신이여, 이 고결한 법정을 지켜주소서)'에서 역사학자 Henry Abraham의 글을 도용한 혐의로 고소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Joseph Bottum은 보수 잡지인 'The Weekly Standard'에 실은 폭로 기사에서 두 글의 비슷한 부분을 나열했다. 그중 대표적인 증거로 제시한 것이 "Taft publicly pronounced Pitney to be a 'weak member' of the Court to whom he could not assign cases(Taft는 Pitney가 사건을 맡기기에 미덥지 않은 나약한 법관이라고 공언했다)"는 문장이었다.  

(The Tipping Point) The Broken Windows Theory

1990년대에 다수의 꽤 직접적인 이유들로 미국 전역에서 폭력범죄가 감소했다. 갱단과 마약 판매상들 사이에 많은 폭력사태를 발생시켰던 크랙 코카인의 불법거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경제의 극적인 회복은 범죄에 끌려들어갈 수 있던 많은 사람이 합법적인 직업을 얻었음을 의미하고, 인구의 노령화는 모든 범죄의 다수를 차지하는 연령대(18~24세 남성)의 구성원이 줄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왜 뉴욕에서 범죄가 감소했는지의 문제는 좀 더 복잡하다. 뉴욕의 범죄 유행이 약해지기 시작했던 시기는 시의 경제가 나아진 때가 아니었다. 경제는 여전히 침체되어 있었다. 사실 도시의 가장 빈곤한 동네들이 1990년대 초의 복지 프로그램 축소로 막 타격을 받은 때였다. 뉴욕에서 크랙 코카인의 유행이 약화된 것도 분명히 한 요인이었지만, 크랙 코카인은 범죄가 줄어들기 훨씬 전부터 꾸준히 감소 추세였다. 인구의 노령화에 관해 말하자면, 1980년대에 뉴욕에 유입된 대규모 이민으로 1990년대에 시의 평균 연령이 높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낮아지고 있었다. 

어쨌든 이 모든 동향들은 점진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장기적 변화였다. 그런데 뉴욕의 범죄 감소는 결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른 무언가가 뉴욕의 범죄 유형을 뒤집는 데 한몫을 한 게 분명했다. 

그 '다른 무언가' 중 가장 흥미로운 후보는 깨진 유리창 이론(the Broken Windows theory)이다. 깨진 유리창은 범죄학자 제임스 Q. 윌슨과 조지 켈링이 주창한 개념이다. 두 사람은 범죄는 무질서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주장했다. 건물의 창문이 깨졌는데 수리하지 않고 방치하면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 건물에는 건물 관리자나 책임자가 없다고 결론내릴 것이다. 곧 더 많은 창문이 깨질 것이고 무법 상태라는 느낌이 그 건물에서 거리로 퍼져나가 무슨 짓이든 허용된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윌슨과 켈링은 도시의 낙서, 공공 무질서, 공격적인 구걸 같은 비교적 사소한 문제들이 모두 깨진 유리창에 해당되며 더 심각한 범죄를 불러온다고 썼다. 

우발적으로 범죄를 저지르건 직업적인 범죄자건, 소매치기건 강도건간에 거리에 만연한 무질서의 상황에서, 잠재적 피해자들이 이미 겁을 먹은 곳에서 범행을 하면 붙잡히거나 신원이 밝혀진 가능성이 줄어든다고 믿는다. 도둑들은 성가신 거지를 행인에게서 떼어놓지 못하는 동네라면 경찰에게 전화를 걸어 수상한 사람의 신원을 확인해 달라고 하거나 실제로 강도짓이 벌어지더라도 경찰이 개입할 가능성이 낮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것이 범죄의 유행 이론이다. 이 이론은 패션 트렌드에 전염성이 있는 것처럼 범죄에도 전염성이 있고 그 유행은 깨진 유리창에서 시작해 공동체 전체로 퍼져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유행에서의 티핑 포인트는 특별한 유형의 사람, 로이스 웨이스버그 같은 커넥터나 마크 앨퍼트 같은 메이븐이 아니다. 낙서 같은 물질적인 무언가다. 특정 유형의 행위에 참여하게 만드는 자극이 특정 유형의 사라미 아니라 환경의 특징에서 나온다. 

1980년대 중반에 뉴욕 교통청에 컨설턴트로 채용된 켈링은 깨진 유리창 이론을 실행에 옮기자고 촉구했다. 교통청은 이 주장에 부응해 수십억 달러 규모의 지하철 재건 시스템을 감독할 새로운 지하철 책임자로 데이비드 건을 영입했다. 

당시 많은 지하철 지지자들은 건에게 낙서 따위는 걱정하지 말고 범죄와 지하철의 신뢰성이라는 더 큰 문제에 초점을 맞추라고 말했고 이런 말들은 합리적인 조언처럼 보였다. 지하철 시스템 전체가 붕괴될 판인데 낙서를 걱정하는 건 타이태닉 호가 빙산 쪽으로 다가가고 있는데 갑판을 청소하는 것만큼 의미 없는 일로 보였다. 하지만 건은 고집을 부렸다. 

그는 "낙서는 지하철 시스템 붕괴의 상징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조직의 재건과 사기 회복 과정을 검토해보면 낙서와의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모든 관리 개혁과 물리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한 대에 약 1천만 달러에 달하는 새 열차를 곧 선보이려 합니다. 그 열차들을 보호하기 위해 뭔가를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열차들은 하루도 못 가 훼손되어버릴 겁니다."

건은 새로운 관리 구조와 정확한 목표, 노선별로 지하철을 청소하기 위한 시간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퀸스와 맨해튼 미드타운을 연결하는 7호차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기술을 동원해 페인트를 깨끗이 닦아내는 실험에 착수했다. 스테인레스 차량에는 용매를 사용했고, 페인트칠된 차량에는 간단히 낙서에 덧칠을 했다. 건은 결코 물러서서는 안 되며 차량이 일단 '복구'되면 다시는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는 "우리는 거의 종교적인 태도로 그 일에 임했습니다"라고 말한다. 건은 열차들이 멈췄다가 회차하여 맨해튼으로 돌아가는 브롱크스의 1호선 종착역에 청소 기지를 세웠다. 낙서가 있는 열차가 들어오면 선로를 전환하는 동안 낙서를 지우거나 그 차량을 운행에서 제외했다. 낙서를 지우지 못한 '지저분한' 차량이 '깨긋한' 차량에 섞여 운행되는 일은 절대 없었다. 공공기물 파손자들에게 확실한 메시지를 보낸다는 생각에서였다. 

"135번가의 할렘에 야간에 열차들을 세워두고 차고지가 있었어요." 건이 말한다. "아이들은 첫날 밤에 열차 옆면을 하얀색으로 칠하고 다음 날 밤에 페인트가 마른 뒤에 와서 밐그림을 그렸어요. 세번째 날 밤에는 색칠을 했죠. 사흘에 걸친 작업이었어요. 

우리는 아이들이 지저분한 열차들 중 하나에 작업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벽화를 완성하길 기다렸죠. 그런 뒤 롤러를 들고 가서 그 그림들에 덧칠을 했어요.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겠지만 우리는 계속 덧칠을 했어요. 

그건 아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습니다. 너희들이 사흘 밤이라는 시간을 열차를 훼손하는 데 쓰고 싶다면 좋아, 그렇게 해. 하지만 그 그림이 햇빛을 보는 일은 없을 거야."

건의 낙서 지우기는 1984년부터 1990년까지 이어졌다. 그 시점에 교통청이 윌리엄 브래튼을 대중교통 경찰국장으로 채용했고 지하철 시스템 교종의 2단계가 시작되었다. 브래튼은 건과 마찬가지로 깨진 유리창 이론의 신봉자였다. 실제로 켈링을 자신의 지적 멘토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따라서 경찰국장으로서 그가 취한 첳 번재 조치는 건과 마찬가지로 엉뚱해 보였다. 지하철에서의 강력범죄(중대범죄) 발생률이 사상 최고에 달하자 브래튼은 무임승차를 엄중 단속하기로 결정했다. 왜 그랬을까?

그는 무임승차가 낙서와 마찬가지로 훨씬 더 중대한 범죄를 불러일으키는 신호, 무질서의 작은 표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매일 17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방법으로 토큰을 사지 않고 승강장으로 들어갔다. 그냥 개찰구를 뛰어넘는 아이들도 있고 몸을 낮춰 힘겹게 빠져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이 부정행위를 하기 시작하면 법을 어기는 짓은 생각해보지도 않았을 사람들도 남들이 요금을 내지 않으니 자신도 내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하며 여기에 가담했다. 

이렇게 하여 문제가 눈덩이처럼 커졌다. 그리고 무임승차와의 싸움이 쉽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문제는 더 악화되었다. 경찰들은 승강장과 열차 안에서 더 심각한 범죄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때에 고작 1.25달러밖에 안 되는 돈 때문에 무임승차자를 쫓는 데 시간을 쓸 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꼈다. 

브래튼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으로, 타고난 리더다. 그는 곧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내가 보스턴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장시간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던 그는 밤에 지하철을 타고 도시를 돌아다니며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하면 그 문제들과 가장 잘 싸울 수 있을지 감을 잡았다. 

먼저 그는 무임승차 문제가 가장 심각한 역들을 골라 사복 경찰을 열 명이나 개찰구에 배치했다. 이 팀은 무임승차를 하는 사람들을 한 명씩 붙잡아 사람들의 충분한 관심을 끌 때까지 승장강에 한줄로 세워놓았다. 대중교통 경찰이 이제 무임승차자들을 엄중 단속할 것임을 가능한 한 공개적으로 알리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이전에는 경찰들이 무임승차자를 쫓아가는 걸 꺼렸다. 체포를 해서 경찰서로 데려가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고 그 서류가 처리되길 기다리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기 때문이다. 보통 가벼운 처벌을 받는 범죄에 그 모든 시간을 써야 했다. 

브래튼은 시내버스를 개조하여 팩시밀리, 전화기, 유치장, 지문 채취 장치를 갖춘 이동 경찰서를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 처리 시간이 한 시간으로 줄어들었다. 

브래튼은 또한 체포된 사람을 모두 검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니나 다를까, 붙잡힌 사람 일곱 명 중 한 명이 이전에 저지른 범죄로 영장이 발부되어 있었고 스무 명 중 한 명이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경찰관들에게 무임승차 문제와 씨름하는 게 타당한 것임을 설득하기가 갑자기 쉬워졌다. 

브래튼은 "경찰들에게는 노다지였다"라고 썼다. "체포를 할 때마다 크래커 잭 상자를 여는 것과 비슷했다. 이번에는 어떤 장난감을 얻게 될까? 총? 칼? 체포영장? 여기서 살인자를 잡을까? (...) 얼마 후 악당들은 상황을 알아차리고 무기를 집에 놔두고 지하철 요금을 내기 시작했다."

브래튼이 취임하고 첫 몇 달 동안 만취나 부적절한 행동으로 지하철역에서 쫓겨난 사람이 세 배나 늘었다. 예전에는 눈에 띄지 않고 넘어갔던 가벼운 범죄로 체포된 건수는 1990년부터 1994년 사이에 다섯 배 상승했다. 브래튼은 대중교통 경찰을 가장 사소한 위반, 지하철의 세부적 문제들에 초점을 맞춘 조직으로 바꾸었다. 

1994년에 루돌프 줄리아니가 뉴욕시장으로 선출된 뒤 브래튼은 뉴욕 경찰국장으로 임명되었다. 브래튼은 같은 전략을 시 전체에 적용했다. 그는 경찰들에게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범죄들을 강력 단속하라고 지시했다. 예를 들어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차의 창문을 닦고 운전자에게 돈을 요구하는 '스퀴지맨'이나 지하철 개찰구 뛰어넘기, 낙서하기 등 모든 범죄행위를 단속했다. 

브래튼은 "이전의 경찰행정은 규제로 족쇄가 채워져 있었어요. 우리는 그 족쇄를 풀어버렸죠. 공공장소에서의 음주, 노상방뇨에 대한 법 집행을 강화하고 상습적인 위반자들을 체포했어요. 거리에서 빈 병을 던지거나 자산에 비교적 사소한 피해를 입힌 행위에 연루된 사람들도 포함해서요. 거리에 침을 뱉으면 감옥에 가게 되는 거죠."

지하철에서와 마찬가지로 빠르고 극정으로 시의 범죄가 줄어들기 시작하자 브래튼과 줄리아니는 같은 원인을 주목했다.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사소한 범죄들이 폭력범죄의 티핑 포인트라는 것이다. 

깨진 유리창 이론과 상황의 힘 법칙은 동일하다. 둘 다 주변 환경의 가장 작은 세부적인 부분들을 손봄으로써 유행이 뒤바뀔 수 있고 급변할 수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They are both based on the premise that an epidemic can be reversed, can be tipped, by tinkering with the smallest details of the immediate environ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