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태파악


"우리가 모두 똑같다고 상상해보라. 우리가 정치, 종교, 도덕에 대해 모
두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음악, 예술, 음식, 커피에 대
한 우리의 취향이 모두 똑같다고 상상해보라. 우리 외모가 모두 똑같다고
상상해보라. 식상하지 않은가? '차이'는 우리를 갈라놓는 개념이 아니다.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자. 자긍심은 모두 인간이 누려야 할 권리다."
(스타벅스 디카페인 그란데 카푸치노 컵 옆면에 적힌 글귀)

크리스털이 나를 대하는 태도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멍청이' 대하듯 했다. 차별대우를 받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순간 문득 밀려드는 후회······ JWT에서 일하던 시절에 크리스털이 나를 대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가 차별 대우했던 젊은 흑인 여성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제니퍼 월시는 1970년대 실시되었던 '소수인종 고용정책 Minority-hiring Initiative'에 힘입어 회사에 들어왔다. 그건 '다양성'을 존중하려는 회사 노력의 일환이었다. 얼마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순전히 소수인종 고용정책 덕에 입사할 수 있었던 만큼 제니퍼는 '부족한' 사람이었다. 내 눈에는 말이다. 나는 그녀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어야 했다.

그랜드센트럴 역에서 크리스털과 전화통화를 하던 그 순간까지 나는 배경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 대우를 당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JWT에 있던 시절에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너무나도 안이하게 선입견을 갖고 대했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때 우리는 동료들 대부분이 아이비리그 출신이라는 점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광고 비즈니스에서 우리는 단연 엘리트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수인종 고용정책 덕에 명문 대학을 나오지 못한 사람이 회사에 들어오면 우리의 위상이 실추된다고 여겼다.

제니퍼는 심성이 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2년제대학을 졸업한 그녀를 나는 JWT의 일원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주지 않았다. 처음 몇 주 동안 나는 광고 카피를 쓸 생각은 말고 우리가 만든 기존의 광고를 찬찬히 공부하라고 지시했다. 그런 후에 포드의 신문 광고 카피를 맡겼다. 제니퍼에게는 생애 첫 광고였다.

제니퍼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겁에 질리다 못해 얼어붙은 표정으로 그녀가 내 커다란 책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역시 JWT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구나 싶었다. 우리는 고객들에게 당당하게 비춰져야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새로운 환경에 도무지 적응을 못한 채 헤매는 것 같다며 핀잔을 주었다.

그러고 나서 광고 초안을 검토한 나는 제니퍼에게 공부해보라고 준 기존의 포드 광고에서 그녀가 아예 한 단락을 그대로 베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JWT의 일원인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표절'이었다. 우리 직업을 하필 '카피'라이터라 하는 것도 부분적인 이유였지만, 우리는 실제로 다른 사람의 작품을 '카피'하는 짓만큼은 용인하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제니퍼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돌이켜 보니 제니퍼는 그게 회사 규정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입으로 콕 집어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어쨌든 그때 나는 그녀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 두 번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제니퍼의 실수는 내가 암암리에 찾던 구실을 제공해 주었다. 나는 그 길로 경영진에게 달려가서 제니퍼는 장차 훌륭한 비서로서 재능을 발휘할지는 모르나, '광고'라는 고도의 기술을 습득할 재목은 못 된다고 말했다. 내게는 제니퍼를 위해, 혹은 '다양성'이라는 아이디어에 대해 재고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내게는 목숨처럼 소중한 일자리 기회를 아무렇지도 않게 취급하는 크리스털을 대하면서 내가 제니퍼를 '돕는다'는 허울 아래 얼마나 잔인하게 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나는 전형적인 위선자였다.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우리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제니퍼의 시도를 방해했던 것이다. 그녀가 내세울 만한 학벌도 없고 이렇다 할 경력도 없는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일이 있은 뒤 제니퍼는 인사과 서무로 자리를 옮겼다. 그 후 지금 이순간까지 그녀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살았다. 기분이 너무나도 착잡했다. 지금쯤 크리스털도 늙고 멍청한 백인 남자에게 실수로 일자리를 제의했다고 후회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그녀가 속한 세상에 어울리지도 않고, 그녀가 원하는 조건에 맞지도 않는 사람일 테니까······ 내가 몇 십년 전에 어느 젊은 흑인 여성을 상대로 느꼈던 것과 똑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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