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털

수잔과 나의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 철저히 오해하고 있었다. 수잔은 내가 요가에 관심 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요가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오죽하면 나는 스트레칭도 좋아하지 않았다. 스트레칭을 하면 근육이 더 뻣뻣해지는 기분만 들었다. 안 그래도 나는 아주 많은 부분에서 뻣뻣한 사람이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나는 예전 노래가 좋고 예전 방식이 좋았다.

그러나 수잔은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게 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요가 강좌가 열리는 장소에서 나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내가 삶의 이런저런 골칫거리들을 더 많이 이해하고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아주 유연하고 속 넓은 사람이리라 생각했다. 말하자면 지혜로운 도인 같은······.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까지 잘못 볼 수 있다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었다. 수잔은 나를 잘못 봤고, 나는 수잔을 잘못 봤다. 나는 수잔이 위로와 보호를 필요로 하는 막막한 처지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꽤 명망 있는 정신과 의사였다. 나는 그녀가 나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다. 수잔은 내가 자신을 도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둘 다 그렇게 서로를 잘못 봤다. 그래도 우리 둘사이에는 처음 보는 순간부터 서로를 강하게 잡아당기는 자력이 작용했다. 혹시 그 강한 화학 작용은 극과 극이 서로 잡아당긴다는 속설의 증거였을까? 하필 처음 만난 장소가 이른 아침 헬스클럽이었다는 것도 이유가 되었다. 나는 달리할 일이 없었고, 수잔은 다음 환자를 보기까지 두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분명 강한 자력을 느꼈음에도 나는 말을 마치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 정도로 뻣뻣한 사람이었다. 싸구려 헬스클럽에 오가다 만난 아무나하고 뭘 어쩌려고······.

“저하고 커피 한 잔 하시겠어요?”

내가 막 문을 나서려는데 수잔이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 어찌나 그 소리가 작았던지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 또한 이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좋죠. 한잔합시다.”

슬픔에 잠긴 저 자그마한 사람과 커피 한 잔 나눈다고 무슨 큰 일이 날까······, 스타벅스에서 라떼나 마시며 그녀의 기분을 돋워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수잔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스타벅스가 아니라 자신의 아파트였다. 나는 그녀를 따라갔고 우리는 그렇게 이어졌다. 그 뒤로 일주일에 두세번, 수잔에게 자유시간이 날 때마다 나는 그녀를 만났다. 알고 보니 수잔은 그렇게 젊은 나이는 아니었다. 40대 중반이었다. 수잔은 일찍이 산부인과 의사에게서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더더구나 결혼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결혼은 아이를 갖기 위한 수단이죠. 섹스는 결혼이란 강요가 없을 때 더짜릿한 거구요.”

그러면서 수잔은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은 이미 결혼한 몸이니 잘 알겠죠.”

수잔은 내 결혼반지를 쳐다보며 그 사실을 내게 상기시켰다. 그녀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이 갔다. 그와 더불어 주체할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나는 수잔과 함께 하는 시간이 무척 좋았다. 하지만 나는 양손에든 케이크를 둘 다 먹고 싶었다. 내 아내를 여전히 사랑했고 내 아이들이 안정된 가정환경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수잔이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한 번도 그런적이 없었는데······.

“당신을 만나야겠어요.”
“언제?”
때는 오전7시 30분. 아침식사를 하기도 전이었다.
“지금 당장······”

수잔의 집으로 갔더니 그녀가 알몸으로 서 있었다. 커튼이 활짝 젖혀진 창밖으로 이스트리버(East River)가 내려다 보였다. 3월이었지만 강물은 따사로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마이클.” 수잔이 속삭이듯 말했다.
“저, 임신했어요. 하느님이 이 아기를 꼭 낳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네요.”

심장이 멋는 것 같았다. 이건 내가 원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직장을 잃어 내 가족을 부양하기도 버거운 형편이었다. 이 상황에 또 다른 아이라니······.

"무슨 생각 해요?”
“당신이 결정할 문제야.”
“당신 생각은 어떤데요?”
“아무 생각 없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다고 유산시키라는 말을 할수도 없었다. 수잔에게는 엄마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이건 기적이에요, 마이클. 하지만 당신 도움이 필요해요.”
“나는 빈털터리야.”

그러자 수잔이 웃었다. 수잔은 나에 대해 또 다른 오해를 갖고 있었다. 내차림이 그럴듯해 보여 나를 대단한 재력가로 생각했던 것이다. 세상을 호령하듯 당당한 겉모습 뒤에서 내가 매일 가난해져간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지못했다. 나는 수잔과의 관계를 죽 비밀에 붙였다. 그러나 조나단이 태어난 뒤 아내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는 우리 관계를 묵인해 주지 않았다.

“외도는 그렇다 쳐도,” 아내 베치가 말했다.
“자식을 본 건 또 다른 문제에요.”
베치는 명민했다.
“나는 감당 못해요. 난 이런 일을 참아낼 주제가 못돼요.”
베치는 내가 저지른 멍청한 짓에 격분했다. 그래도 우리는 '우호적으로' 이혼했다.
“난 우리가 평생 함께 할 줄 알았어요.”
아내의 그 말에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아이들은 이제 다 커서 성인답게 이해해 주긴 했지만, 상처받고 슬퍼하는 기색은 역력했다. 나는 베치에게 우리 집을 주었고 아내에게는 가정을 꾸려갈 자금이 충분했다. 하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베치의 인생을 망쳤다······. 그리고 나 자신의 삶도 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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